박세당이 이곳에 머문 바 있는 김시습을 흠모하여 그의 영정을 봉안하여 건립한 사당.

김시습을 기념하는 사찰인 석림사를 낙성한 박세당은 김시습을 위한 영당(影堂:영정을 모신 사당)의 건립도 서둘렀다. 홍산(鴻山)의 사림들이 무량사에 봉안되어 있던 매월당의 영정을 모실 새로운 영당을 건립한 것이 그 계기가 되었다. 무량사는 김시습이 생을 마감한 곳으로 생전에 김시습이 직접 그린 영정이 보존되어 있었다. 이 영정은 이이에 의해 김시습의 작품으로 인정된 명품의 초상화였다. 이 기회에 박세당은 수락산에 영당을 건립하여 김시습의 자필 영정을 모사하여 봉안할 계획을 세우게 된 것이다. 그러나 자신과 석림암, 은선암의 승려들로서는 막대한 공역을 충당할 수 없다고 판단한 박세당은 의연금요청문을 지어 유지자의 협력을 촉구하였다. 『서계집』에 수록된 「매월당영당권연문(梅月堂影堂勸緣文)」이 바로 그것이다. 이 글은 은선암의 승려들을 위해 지은 장문의 호소문으로서 서계의 문장실력이 발휘된 명문이기도 하다.

이런 과정을 거쳐 1680년(숙종 6) 마침내 수락산의 동봉 아래에 영당이 완성되었다.
1686년(숙종 12)에는 무량사에서 옮겨와 모사한 영정을 봉안하고 봄, 가을로 제사를 행하기 시작하였다. 여러 정황으로 보아 당초 영당의 공식적인 명칭은 동봉사우(東峯祠宇)였으며, 박세당을 중심으로 약 15년 동안 제사가 이루어진 것으로 생각된다. 박세당은 자신이 먼저 영정에 찬을 붙인 다음 아들 태보에게도 찬을 붙이게 할 만큼 김시습의 영정에 대해 각별한 애착을 보였다. 영정을 모사한 화가는 분명하지 않지만 박세당과 친분이 깊었던 조세걸이 아닐까 싶다.

이런 배경 하에서 1700년(숙종 26)에는 양주 사림들에 의해 사액을 청원하는 운동이 전개되었고, 이듬해인 1701년(숙종 28)에는 조정으로부터 ‘청절사(淸節祠)’라는 편액이 내려지게 되었다. 박세당이 사망하기 2년 전의 일로서 추모사업의 일단락을 의미했다.
현재 청절사 자리에는 노강서원(鷺江書院)이 이건되어 있어 남아있지 않다.
옆에 세워진 청풍정도 마찬가지로 남아있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