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절사(淸節祠) 옆에 있는 정자.

매월당 김시습 선생의 영정을 봉안한 사당(청절사, 淸節祠)의 완성은 이어 부속 건물의 건립을 수반하였다. 비록 서계선생이 사망한 이후였지만, 영당 옆에 정자가 없을 수 없다는 이유에서 서계의 문인들을 중심으로 정자 건립의 논의가 일어났다.
주도자는 이덕수와 유언보였다.

이에 논의가 합일되어 1729년(영조 5) 청절사 전방의 개울가에 작은 정자가 완성되었고, 이어 서계의 문인들은 이를 기념하는 연회를 열었다. 이 자리에서 이덕수는 백이, 숙제에 비견될 만한 동봉 김시습의 청풍대절(淸風大節)을 기려 정자 이름을 청풍정이라 명명하고, 당대의 명필 윤순(호 백하, 白下)으로 하여금 편액의 글씨를 쓰게 했다고 한다.

이후 청절사와 청풍정은 서계의 후손들과 양주사림을 중심으로 대한제국기까지 유지되어 왔다.
이 과정에서 수락산을 유람하는 수많은 문사(文士)들의 내방 속에 때로는 존경을, 때로는 외면을 받았다. 1779년(정조 3) 이 유람한 이엽은 유람기에서, 당시 청풍정은 「洗耳亭」으로 편액이 바뀌어져 있었고, 청절사는 황량하게 퇴락했지만 매월당의 화상만은 맑은 기운이 가득했다고 적고 있다. 여기에 비해 1819년(순조 19) 노론 산림 홍직필(호 매산, 梅山)의 유람기에 따르면, “부처의 형상에, 머리는 깍고 수염을기른 김시습의 모습에 기이함을 느꼈고, 심원록(審院錄)에 서명도 하지 않았다”고 적고 있다.

지금은 청절사도 청풍정도 남아 있지 않다.
청절사 자리에는 노강서원(鷺江書院)이 이건되어 있어 그 자취를 느낄 수 없지만, 주위산천의 호위속에 굳건히 자리하고 있는 주춧돌이 옛 모습을 추상시키고 있다.